본관은 벽진(碧璡). 자는 성진(聖珍). 세자시강원보덕 이상급(李尙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동(李埬)이다. 아버지는 이지걸(李志傑)이며, 어머니는 권순열(權順悅)의 딸이다. 이세진(李世璡)의 형이다.
1697년(숙종 2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정언·사서·문학·수찬·교리 등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다. 1699년에 지평이 되어 당시 이조판서인 신완(申垸)에 대한 탄핵을 강력히 요청했는데, 국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매우 방자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리어 자신이 탄핵되었다.
이 일로 오랫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1706년(숙종 32)에 이태좌(李台佐) 등 19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들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군신이 서로 믿고 따르도록 공정해야 하며, 백성을 구하는 방도와, 선비와 절의를 숭상하는 정사(政事)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1712년 효종의 북벌대의(北伐大義)와 왜란 시 욕됨을 상기카지노 차무식 더욱 자강에 힘써야 한다고 개진하였다. 1716년(숙종 42)에 교리로서 윤증(尹拯)의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빨리 내리도록 상소카지노 차무식 허락을 받았으나, 이어 1718년에 다시 윤선거(尹宣擧)·윤증 부자의 추삭(追削) 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판결사(判決事)로서 사직소를 올렸다.
그 뒤 충청감사로 나아갔으며, 1721년(경종 1)에 특별히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계속 충청감사로 외직에 머물렀다. 이 때 죄인 이이명(李頤命)을 사사(賜死)하라는 전지(傳旨: 왕의 명령서)와 관문(關文: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리는 명령서)이 차령(車嶺)에 이르렀을 때, 이이명의 사위인 김시발(金時發)이 이를 절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빨리 처리하지 않았다 카지노 차무식 나문(拿門)되었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의, 좌윤·대사간·대사헌을 거쳐 1731년(영조 7)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이 때 역대 왕의 훌륭한 말과 선정을 모아 편찬한 『성조갱장록(聖朝羹墻錄)』을 지었다.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