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신 주어사 강학소는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이 주어사에서 1868년부터 거의 매년 겨울에 동료 또는 제자들과 함께 강학(講學)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어사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명품리 산 106번지에 있었으나 1862년 이전에 헐리고 터만 남아 있다. 2009년 지표조사로 5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강학 때 유학만 논의했다는 설도 있고, 양명학을 논의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1779년 강학 때 유학뿐 아니라 천주교도 논의했다는 설도 있어, 천주교에서는 주어사 터를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로 기리고 있다.
모바일 슬롯 머신 게임C815;모바일이 지은정약전(丁若銓)의 묘지명과권철신의 묘지명에 주어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선 정약전의 묘지명에 보면, 언제가 겨울에 권철신이 정약전, 김원성(金源星), 권상학(權商學), 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문도들과 함께 주어사에 가서 머물며 강학(講學)했다. 그때 스승 권철신이 직접 정해 준 규정에 따라,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해 뜰 무렵에는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을, 정오에는 정이(程頤)의 「사물잠(四勿箴)」을, 해질녘에는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을 외게 했는데, 씩씩하고 엄숙하며 정성스럽고 공손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고 언급되어 있다.
다음으로 권철신의 묘지명에 보면, 기해년(1779) 겨울에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정약전 등과 함께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때, 눈 오는 밤에이벽(李檗)이 찾아와 촛불을 밝혀 놓고 경서를 담론했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庵走魚寺雪中李檗夜至長燭談經]. 그러나 그 뒤 7년이 지나서 비방(誹謗)이 생겨 강학을 다시 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가 수집하여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1784년 간행된 달레(Dallet) 신부가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에도 권철신이 문도들과 함께 절에 가서 머물며 강학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즉, 정유년(1777)에 권철신이 정약전 등의 문도들과 함께 방해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외딴 절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이 겨울에 눈길을 100여 리나 걸어서 자정께 한 절에 도착했으나, 그가 찾아가는 절은 그곳이 아니라 그 산 뒤쪽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벽은 승려들을 깨워 앞세우고 권철신이 문도들과 강학하고 있는 절에 도착하여 함께 10여 일 학문을 토론하면서 유교 경전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도 검토하여 어렴풋이 알게 된 천주교를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이승훈의 저술로 이야기되는슬롯사이트 꽁머니B9CC의 「십계명가」와 「천주공경가」의 제목 협주(夾註)에도 주어사 강학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이 책 중 「만천시고(蔓川詩稿)」에 실려 있는 한시 31제 71수 대부분이홍석기(洪錫箕)와 양헌수(梁憲洙)등의 시를 베낀 것이고, 제목 협주에 이벽의 저술로 기재되어 있는「성교요지」도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마틴(Martin)의 『상천자문(雙千字文)』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만천유고』는 이승훈의 저술이 아니라 위서(僞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주어사 강학에 관한 내용은 사료적 가치가 없다.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강학 장소로 이용한 주어사는 각종읍지(邑誌)의 사찰 항목이나 고지도(古地圖)에 실려 있지 않다. 또한 정약용이 지은 묘지명에도 그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주어사의 위치를 알 수 없었는데, 남상철(南相喆)이 1962년에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현,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명품리)에서 누대 살아온 당시 86세 된 박영소 노인의 도움을 받아 주어사 터를 확인했다. 금사면 하품리 주어 마을 뒤쪽 앵자산 동편 골짜기 3㎞ 지점에 있던 주어사는 1962년 당시로부터 100여 년 전에 이미 헐리어 없고 그 터만 남아 있었다. 절터에서 ‘해운당 대사 의징의 비[海運堂大師義澄之碑]’가 발견되었는데, 그 뒷면에 “숭정 기원후 무인년(1638, 인조 16)에 세웠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주어사는 1638년 이전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77년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문화유적총람』 상권 여주군편 ‘여주 하품리사지’ 항목을 통해 주어사 터의 주소는 ‘금사면 하품리 산 106번지’이고, 절터의 규모는 약 500평이라고 밝혀져 있다.
이 주어사 터에 대한지표조사가 2009년에 여주군 문화재사업소의 의뢰로 재단법인 겨레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주어사 터는 산북면 쪽 앵자봉 자락의 해발 365~400m의 골짜기 사이의 비탈진 곳에 있고, 그 비탈진 곳에 석축 단을 쌓아 조성한 건물지(建物址) 5기가 확인되었다. 그중 1호 건물지 바로 아래쪽에 있는 2호 건물지가 절의 중심 건물지로 가장 규모가 크다. 그 규모를 보면 2호는 장축 15m, 단축 5.5m, 3호는 장축 10m, 단축 5m, 5호는 장축 7m, 단축 4.5m이다. 1·2·3·4호 건물지에서 백자편, 도기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는데,기와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백자편들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지표조사로 볼 때, 주어사는 비탈진 곳에 조성된 5동의 건물로 구성된 작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규모가 작은 절이었기 때문에 주어사가 각종 읍지의 사찰 항목이나 고지도에 수록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근기남인실학자인 성호의 만년 제자이기도 한 권철신은 광주의바카라 카지노C548;바카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고, 1768년부터는덕산의 정산 이병휴(貞山李秉休)의 문하에도 드나들며 학문을 닦으면서 그의 제자인이기양(李基讓)과도 학문을 토론했다. 뒤에 관계에 진출한 이기양과 달리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러면서 그는 1768년 겨울, 1770년 여름, 1773년 겨울, 1777년 겨울, 1779년 겨울 등 거의 매년 겨울에 동료들 또는 문도들과 함께 산사에 가서 강학했다. 1768년 겨울과 1770년 여름에는 그의 동료들인 이기양, 한정운(韓鼎運) 등과 함께, 그리고 1773년 이후에는 그의 문도들인 정약전, 김원성, 이총억, 권상학, 이벽 등과 함께 산사에 가서 강학했다.
이와 같이 권철신이 그의 동료 또는 문도들과 함께 가서 머물며 강학한 산사는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의 묘지명에는 ‘주어사’로 명시되어 있다. 즉, 언젠가 겨울에 권철신이 그의 문도들인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주어사에 가서 강학했다고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러나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로 애매하게 밝혀져 있다. 즉, 1779년 겨울 정약전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천진암 주어사에 가서 강학했을 때,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와 촛불을 밝혀 놓고 경서를 담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산사에 가서 머물러 강학할 때, 스승이 참여하기에 편리한지와 강학하기에 적합한지를 우선 고려하여 마땅한 사찰을 정했을 것이다. 5개의 건물지가 확인된 주어사는 좌장(座長) 내지는 스승으로서 강학을 주도하는 권철신이 사는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에서 가까워 가기가 편리하고, 또한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강학하기에는 충분하고 한적하여, 권철신이 문도들과 함께 가서 머물며 강학하기에 적합한 절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언젠가 겨울에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주어사에 가서 머물며 강학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1779년 겨울에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산사에 가서 머물며 강학할 때,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와 참여한 ‘천진암 주어사’도 ‘주어사’로 판단된다. 즉, 천진암이 각종 읍지의 사찰 항목이나 고지도에 수록될 정도로 큰 절일 뿐만 아니라 명승지로도 널리 알려진 절인 점을 고려하고, 또한 주어사와 천진암이본사와 부속 암자(庵子)의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면, ‘천진암 주어사’는 ‘천진암의 본사인 주어사’라는 표현, 즉 ‘주어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주로 머물며 강학한 산사는 주어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권철신과 그의 동료 또는 문도들이 산사에 가서 머물며 강학할 때 논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언젠가 겨울에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주어사에 가서 강학할 때 스승 권철신이 정해 준 규정에 따라 송대 성리학자들이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잠들, 즉 주희의 「경재잠」, 정이의 「사물잠」, 장재의 「서명」, 진백의 「숙흥야매잠」 등을 외웠다고 한 정약전의 묘지명과 1779년 이벽이 눈 오는 밤에 참여한 강학 때 촛불을 밝혀 놓고 ‘담경(談經)’, 즉 ‘경서를 담론했다’고 한 권철신의 묘지명에 따라 강학 때 논의한 내용을 유학으로만 보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정유년(1777) 겨울에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외딴 절에 가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이 눈 오는 밤에 찾아가 함께 10여 일 학문을 토론하면서 유교 경전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도 검토하여 어렴풋이 알게 된 천주교를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한 달레(Dallet, Claude Charles)) 책의 기록에 따라 유학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보는 설이다. 이 학설에 따라 천주교에서는 주어사 터를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로 기리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이기양과 권철신이 1864년과 1868년부터 자득(自得)을 중시하는 성호의 가르침에 따라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하여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한 이병휴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양명학을 계승 · 발전시켜 나간 점을 고려하여, 권철신과 그의 동료 또는 문도들이 산사에 가서 머물며 강학할 때 논의한 내용을 양명학으로 보는 설이다. 이병휴의 학통을 계승한 이벽이 1783년에 가서야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점이나 그 이전까지는 이기양과 권철신이 양명학을 따르는 문제를 안정복이 주로 비판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세 가지 설 중 권철신과 그의 동료 또는 문도들이 산사에 가서 강학하며 논의한 내용을 양명학으로 이해하는 설이 좀 더 타당해 보인다.